선우정아는 좋아하면서도 존경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입니다.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프로듀싱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합니다. 지난 8월에 나온 EP 'Stunning'은 그가 여전히 뛰어난 가수이자 프로듀서임을 입증하고 있는 수작입니다. 이 앨범의 제목은 빛나는 감정과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각 트랙들은 선우정아의 빼어난 목소리를 기반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Fall Fall Fall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어쩔 줄 몰라하는 벅찬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컬만큼이나 격정적인 조성태의 피아노와 오르간, 백경진의 베이스 연주를 즐겨주세요!”
화려한 피아노 연주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그러면서도 베이스와 오르간, 신스 등 소외되는 악기 하나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보통 한 악기의 기교에 의존하는 곡은 쉽게 지루해지거나 다른 악기들이 들러리가 되는 경우도 종종 보이곤 하는데 이 곡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모든 악기의 터치감이 매우 강해 리듬이 더욱 쫀득하게 들립니다. 건반이나 베이스, 드럼 등이 강약 조절이 의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소위 ‘찰지게’ 치고 빠지는게 곡을 매우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4분이 넘는 시간 동안을 다이나믹이 심한 소리로만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저기로 튀어나오는 악기들의 공격성을 보컬이 품어 한 공간으로 채워줍니다. 선우정아의 가창력이야 이미 유명하지만 그는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매우 능한 것 같습니다. 제가 선우정아의 곡에서 감탄하는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백그라운드 보컬, ‘코러스’ 활용입니다. 코러스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 노래를 들으면 뭔가 비어있다거나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적당히 공간감을 부여한 백그라운드 보컬이 적재적소, 주로 후렴에 활용되며 메인 보컬이나 다른 악기의 타격감을 감소시키는역할을 합니다. 그 외에 왼쪽과 오른쪽에서 다른 멜로디나 가사를 부르는 코러스, 패닝을 통해 좌우를 움직이며 생동감을 불어넣는 ‘쉿~’과 같은 소리 등 목소리의 활용을 곡을 다시 들을 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외 곡을 시작할 때 “또”라는 가사에 딜레이를 통해 정말 떨어지며 메아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거나, 상승했다 하강하는 피아노 멜로디를 통해 정말로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것을 표현하는 등 가사 외에 곡 자체의 성질만으로 제목과 결부되는 표현이 감상을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생애
“‘여행은 계속된다. 시간의 폭우를 뚫고. 고장난 나침반이 가진 전부인, 철없는 항해.’ 인간의 모든 순간이 질풍노도의 시기인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계속되는 질풍노도를 담으려 했습니다. [백년해로]처럼 선우정아 밴드 포리듬 멤버 이지원, 원똘, 백경진, 조성태와 다 함께 채운 곡이라 더욱 행복하게 느끼는 곡이에요. ”
생애는 간결한 코드진행과 반주 위에 잔잔히 내뱉다 갈수록 고조되며 후렴에서 터트리는 진행이 인상적인 곡입니다. 실제 파도소리와 심벌 소리를 섞으며 시작되는 도입부가 정말로 항해를 떠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 후 피아노와 기타를 메인으로 a-a-b의 평범한 진행을 보이다가 2절의 a-a 파트 이후 후렴이 아닌 브릿지로 바로 진행이 급격하게 바뀝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화성은 물론 일렉기타 스크래치 주법을 쓰고, 전까지 나타나지 않은 신시사이저가 쓰이는 등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생각해...(중략)...날개를 펴’의 가사와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철없는 항해에서 목적지를 찾는 과정에서의 고뇌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결론은 결국 마지막에 계속 반복하는 ‘나도 몰라’로 이어지는 것이, 어찌보면 삶의 목적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이렇게 인생을 성찰하는 주제의 곡들은 대게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투로 전개될 때가 많은데 오히려 솔직하게 모르겠다는 가사를 보니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Invisible Treasure
“‘투명보물’이라는 제목인데, 내가 가진 장점과 강점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두려울 때가 있겠지만 사실 그것들은 언제나 든든하게 내 안에서 나를 채워주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밝은 이야기를 다루기 좀 어려워하는 터라 가사를 함께 완성하자고 신애에게 부탁했어요. 뚝딱 멋지게 완성시켰길래 어떻게 작업했냐 물으니, 조카가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하는 걸 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리드미컬한 드럼 샘플, 일렉기타와 베이스가 어우러진 경쾌한 사운드의 곡입니다. 이 곡에서는 특히 다양한 퍼커션을 차용하며 드럼에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곡의 시작부터 중요한 순간마다 들어오는 윈드 차임은 ‘사운드 이펙트’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절 verse에는 쉐이커를 사용하고 그 이후에는 하이햇을 다시 사용하는 등 곡 진행에 따른 세심한 샘플 사용이 돋보입니다. 그 외에는 통통 튀는 베이스와 다양한 패드 소리가 지루해지려고 할 때 쯤 치고 들어옵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는 앞의 두 트랙보다는 무난합니다. 곡 전체적으로도 극적인 변화보다는 주제인 ‘Invisible Treasure’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상대적으로 단조롭습니다. 여담이지만 자신의 어둠 속을 캐어 내 숨겨진 보물을 찾는다는 내용이 꽤 인상적이었는데 소개문구를 보니 이제 마인크래프트만 생각나네요.
To Zero
“시처럼 만들어진 가사에 음악을 붙인, 저에겐 흔치 않은 방법으로 만든 곡입니다. 중금속과 미세먼지가 날리는 신디사이저 현실에서, 잠시 따뜻하고 말끔한 어쿠스틱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결국 환상은 무너지며 끝나는. 그 사운드의 흐름이 잘 전달되면 좋겠어요. 연인과 함께 겪은 상처와 부끄러움들이 싹 다 지워지고 Zero의 상태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내용입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가 엿보이는 곡입니다. 곡이 시작되면 퍼지는 패드 소리와 함께 노이즈가 보컬에 섞여 들립니다. 처음에는 제 스피커가 고장났거나 녹음이 잘못된 줄 알 정도로 의도적으로 크게 들어갔습니다. 소음이 섞인 채로 보컬이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텁텁한 목소리로 읊조리다 현악 4중주를 만나 부드럽게 퍼지고, 갑작스럽게 이질적인 사운드가 치고들어오는 진행이 인상적입니다. 주로 사용한 사운드 샘플이나 신시사이저도 그렇고, 제목이나 가사의 분위기, 급변하는 곡의 구성도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우주를 연상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들었을 때와, 아티스트의 소개 문구를 읽고 들었을 때의 감상이 가장 다른 곡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어 'Stunning'에는 단순히 반짝거린다는 말 말고도 ‘멋있다’, ‘우아하다’, ‘기품이 느껴진다’는 뜻도 존재하는데 이 노래 역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훌륭함과 우아함이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Classic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 힘, 장르에 갇히지 않는 유연함, 쉽게 무너지지 않는 깊이. 제가 생각하는 클래식에 대한 생각들이에요. 다 필요 없고 그냥 멋지게 만든 곡이라고 소개하고도 싶어요. 저라는 음악인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멋짐은 어떤 에너지의 어떤 모양일까,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노래입니다. 저도 트렌디한 것들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결국엔 클래시컬한 방향을 선택하는 음악인이기도 합니다.”
이 앨범 내에서 가장 주제의식이 명확하게 표현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classic’이란 말이 ‘옛 것의’, ‘전형적인’과 같이 다소 낡은 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최고의’, ‘유행을 타지 않는’과 같은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고전’이라는 단어는 오래되었다는 것을 차치하고, 그 세월을 지나 먼 미래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stunning’과 같이, ‘classic’은 음악인으로서 선우정아의 자신감과 기품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진 곡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는 소개글에 걸맞게 아티스트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듯한 곡이라 느껴집니다. 자존감과 의지가 넘치지만 과도하지 않고 절제된 가사, 다양한 음역대를 넘나드는 보컬과 이를 적절히 보조하는 여러 보컬 이펙터들, 끈적하면서도 탄탄하게 리듬을 전개하는 비트에 귀를 즐겁게 하는 여러 신시사이저들 등 앞서 다른 곡에서 언급했던 선우정아의 특징과 장점이 결집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조금만 과하게 투입되면 곡이 산만해지거나 난해해질 수 있는데 완벽한 완급조절을 보여줍니다. 전작 ‘SAM SAM’의 경우 주제가 축약하기엔 너무 무거워서인지 곡이 전체적으로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개인적으로는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Classic’은 상대적으로 간결하게 진행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난 어디든 있지, 새로움이 있는 모든 곳에”
첫 가사로 곡의 설명을 끝내버립니다. 함축적이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데, 그러면서도 말의 유희와 멋을 잃지 않는 훌륭한 한 마디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가사 역시 자신이 새로운 것을 무작정 좇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곧 유행이고 고전이다’라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제재를 곡을 듣는 청자로 변경하여 ‘네가 어떤 걸 좋아하든 결국 내 음악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내용을 전개합니다. 이처럼 주제는 같아도 표현하는 대상이나 방법을 바꿔 자칫 지루한 자기자랑으로 귀결될 수 있는 흐름을 틀어버립니다. 브릿지에서의 가사는 아마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들을 언급하며 헌사를 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명확한, 그러면서 뻔하지 않아 좋은 가사라는 생각입니다.
사운드적으로도 굉장히 균형을 신경 쓴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dry한 드럼 비트와 베이스에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백그라운드 보컬과 신시사이저는 공간계를 적극 활용하여 퍼지는 사운드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컬은 고음역대를 강조하며 마치 청자의 위에서 말하는 느낌을 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좌우를 움직이며 들리는 코러스와 다양한 신시사이저 소리가 전체적인 음압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곡을 더욱 풍성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Classic’만이 믹스, 마스터를 제외하고 작편곡 및 녹음 모두 선우정아 단독 작업입니다. 이 노래가 이 앨범에서 가장 ‘Stunning’이라는 주제에 걸맞는, 티이틀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앨범이 나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게을러서 쓰는 데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그보다 최근 끌리는 음악이 없어서 글을 쓸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는데 좋은 노래를 들으니 주저리 글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우정아의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을 하나 남겨드립니다. 최근 MBC에서 방영하는 ‘놀면 뭐하니’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어떻게 악기로 활용하는 지 볼 수 있습니다.
목소리 자체가 악기인 '선우정아'의 코러스!
놀면 뭐하니? :유플래쉬X뽕포유 | 목소리 자체가 악기인 '선우정아'의 코러스! [추석특집 놀면 뭐하니?]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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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아티스트의 작업물에도 간혹 코러스로 참여하곤 하는데 아실만한 한 곡 소개해드립니다.
자세히 들으시면 선우정아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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